SINCE 1948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걸어온 길
1948년 CCF로부터 출발하여 지난 60여 년간 세상 모든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어린이재단은 한국의 사회복지 역사와 그 궤를 함께하며 기부 문화를 선도해 온 뿌리 깊은 아동복지 전문기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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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걸어온 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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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962
미국 의존의 시기 - 1963~1975
발돋움의 시기 - 1976~1986
자립 준비의 시기 - 1987~1996
복지사업 확장의 시기 - 1997~2007
해외 본격화의 시기 - 2008~현재
글로벌 도약기
1948~1962
미국 원조를
받던 의존의 시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은 난민구제사업을 위한 모금전문가 클라크목사의
미국기독교아동복리회(CCF) 한국지부 설립으로시작됐습니다.
당시 클라크 목사는 중국아동돕기를 위해중국에 머물러 있었는데, 중국
못지 않게 심각했던 한국으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1948년 10월 구세군
후생학원, 혜천원, 절제소녀관 3개시설에서 400여명의 아동을
대상으로 CCF 한국지부의 첫 재정지원이시작됐습니다. 1960년까지
아동복지에 대한 뚜렷한 방침이 없었던 한국에서 CCF의 아동구호는
여러 외국 원조기관 중에서도 양적, 질적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1963~1975
아동복지사업의 선두로
발돋움한 시기
한국전쟁으로 인한 구호가 어느정도 해결되었지만 복지시설에서 생활
하는 어린이의 수는 계속 증가했습니다. 당시 CCF는 ‘아동은가정에서’를
모토로 가정중심의 아동복지사업을 제시했습니다. 시설에 수용된 아동
중 연고자가 있거나 입양, 위탁 등으로 가정으로 복귀시킬 수 있는
아동은 가족의 품안에서 키우도록 한 것입니다. 이 때 탄생한 아펜셀라
어린이회는 미국의 후원자와 한국어린이를 1대 1로 결연하는 사업을
전개하며 거택보호사업을 본격화했습니다. 더불어 직영사회복지관을
운영하고, 낮 동안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돌보는
어린이집과 지역의 사회복지기관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이는 현재지역 내저소득층을 통합적으로 지원하는‘사회복지관’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1976~1986
자립 준비의 시기
한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CCF는 아프리카 아동을 돕기 위해
지원을 종결했습니다. 대신 CCF는 재단이 사업을 무리없이 계승하도록
10년의 완충기간을 두었습니다. 재단은 CCF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민간
사회복지기관으로 도약하기 위해 후원자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재단은 경제발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과 ‘우리아이들은 우리 손으로돕자’는 물결에 힘입어 결연 사업의 정부수탁, 서신 교류서비스 시작,
전국후원회와 해외후원회조직, 언론과의 활발한 협력 등 후원자 개발 및
기금 마련에 힘썼습니다. 실종아동찾기사업을 실시한 것도 이 때입니다.
1983년 미아찾기운동을 추진한 재단이 1986년 정부로부터 어린이
찾아주기사업을 공식 위탁 받아 운영했습니다. CCF는 1986년에 이르러
약 1억달러, 10만명 지원의 빛나는 역사를 뒤로하고 외원지원을 종결
했습니다. 재단은 ‘한국어린이재단’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1987~1996
국내복지사업 확장의 시기
재단은 자립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고 새로운 복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결손가정아동을 포함해 소년소녀가장, 65세이상노인, 장애인 등으로
사업대상을 확장했습니다. 그러한 사업방향을 반영해 명칭을 한국
어린이재단에서 한국복지재단으로 변경했습니다. 당시 재단은 정부차원
에서도 활성화시키지 못한 가정위탁보호사업을 시도, 1993년부터 가정
위탁양육을 수행했습니다. 또 아동학대예방사업을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아동복지법을 개정하고 아동보호전문기관을 설립하는 등 아동보호
사업의 역사에 선명한 자취를 남겼습니다. 생방송과 담뱃갑 광고 등을
활용한 실종아동찾기사업도 활성화했습니다. 이 시기에 본격적인 해외
아동돕기사업에도 뛰어들었습니다.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아시아
3개국 지원을 시작으로 해외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며 전문 사회복지기관
으로서 도약하는 시기를 맞았습니다.
1997~2007
해외사업 본격화의 시기
IMF 외환위기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복지사업의 다각화를
실시했습니다. 사회복지관내에 아동가족상담센터를 통합해 운영했고,
구로노인복지관•중증장애 아동을 위한 한사랑장애영아원•중증
장애인 자활을 위한 한사랑 학교 등 을 개소해 복지사업의 대상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더불어 아동보호전문기관 8개소를 개소했습니다. 2003년
에는 이미 시행하고 있던 가정위탁사업을 10개소로 확장 운영했으며,
2005년 보건복지부로부터 공식위탁받아 실종아동전문기관을 개소
했습니다. 한편 해외사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2002년에는
국제어린이재단연맹(ChildFund Alliance)의 회원국으로 가입해 중국,
스리랑카, 에티오피아, 우간다 등 을 지원했습니다. 2001년 부터는 대북
지원사업을 시작, 영양 및 보건의료지원사업 등 을 전개했습니다.
2008~
글로벌아동복지대표기관을 목표로!
재단은 2008년 1월창립 60주년을 기념해 CCF의 정신을 계승, UN 아동
권리협약을 기초로 복지대상을 아동으로 재편하고, 명칭을 ‘어린이
재단’으로 변경했습니다. 어린이를 폭력과 학대로부터 예방, 보호하기
위해 2009년 실천적 아동폭력예방프로그램인 CAP을 국내 최초로 도입
했으며, 성학대 피해아동지원을 위한 캠페인을 실시해 아동성폭력
가해자 공소시효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재단은 대표아동복지전문기관으로 성장한 만큼 기부 문화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 각계각층의 단체 및 시민들과 함께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금전문가육성, 사회적 관심을 유도하는 홍보•마케팅 강화,
보편적 아동 행복을 위한 권리 옹호 캠페인 전개, 후원자 서비스 강화 등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1940년대 Clark관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온 CCF 관계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1940년대 최초로 CCF에 가입한 시설 중 하나인 서울구세군 후생학원의 원아들
1948년 9월 30일 대구 육아원 직원과 아이들
6.25 전쟁이 벌어지고 난 후 제주도로 피난했을 당시 한국보육원 아이들
1950년 5월 26일 CCF는 한국지원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서소문에 자체 건물을 마련했다.
1950년대 한국에 방문한 클라크 목사가 직원과 아이들과 함께 걷고 있다
1950년대 한국의 한 시설을 방문한 클라크 목사가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1954년 11월에 열린 기독교 아동복리회의 원장 회의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954년앨랜 시틀러 지부장과 직원들
1957년 4월 11일 Light House 본관 신축 정초식 때 클라크 총재가 기념사를 하고 있으며, 당시 한국 책임자인 Nash 부처도 함께 참여했다.
1958년 기독교 아동복리회의 주선으로 홍콩을 방문한 한국보육원 밴드부원들이 국악을 연주하고 있다.
1958년 기독교 아동복리회의 주선으로 홍콩을 방문한 한국보육원 아이들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춤 중 하나인 승무를 선보이고 있다.
1960년 Menry 지부장과 직원들
1960년 클라크 총재가 화성 영아원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만났다. 당시 시설에서 지내는 아이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로써 CCF가 주력한 부분이었다.
1960년대 재단 산하 탁아시설장을 방문한 직원들
1964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켐프 총재가 병실을 돌며 아이들을 위로하고 있다.
1964년 12월 부산보건원 준공식에 참석한 캠프 총재 부부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1967년 CCF 한국지부 직원들
1968년 기독교 봉사회의 후원으로 과자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충남삼신보육원 아이들
1969년 5월 19일 야유회에 참석한 직원들이 다양한 레크레이션 활동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1970년대 강가에서 물놀이 중 기마싸움을 하고 있는 남자 아이들의 모습
1970년대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익살스럽게 사진을 찍고 있다.
1970년대 사회복지관에서 레크레이션을 하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1970년대 사회복지관의 프로그램실에서 아이들이 단잠을 자고 있다.
1970년대 사회복지관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
1970년대에 들어 CCF는 직원들의 자질 향상에 큰 관심을 쏟으며 해마다 사회사업가들을 위해 세미나를 개최했다. 1971년 10월 23일 제1회 사회사업가 수양회에 참석한 직원들
1971년 1월 11일에 첫 국내후원자였던 삼각교회 청년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977년 CCF 서소문 서울지부 사무실에서 타자기를 치고 있는 여직원들
1977년부터 발간한 소식지 단비(현 초록우산) 표지 모음
1978년 CCF 30주년 기념식 현장. CCF는 1986년 한국지원을 종결하기로 하고, 10년간의 준비 기간을 갖던 중이었는데 본 행사를 통해 그 동안의 사업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1979년 6월 20일부터 2박 3일간 임직원들 한국어린이재단 시설협의회 정기총회에 참석했다.
1979년 한국어린이재단 사무실의 외관
1980년대 우유갑에 실은 미아 찾기 광고
1981년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최불암 씨가 업둥이로 데려온 금동이
1982년 8월 18일 사회복지시설 합동 결연식에 참석한 아이들과 후원자
1982년 밝은 표정의 아이들
1983년 2월 결연사업에 동참한 MBC 드라마 '전원일기' 연기자들
1983년 4월 23일 제8회 충청남도 삼백만 도민 모금 걷기운동에 참여한 시민들
1984년 유아원 보육교사 강습회
1986년 10월 31일 한국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CCF로부터 받던 지원을 종결, 순수 민간기관으로 자립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종결식과 아동복지 세미나를 개최했다.
1986년 실종 아동을 찾기 위해 진행한 '엄마, 아빠 저 여기 있어요' 방송 진행 중에 스튜디오에서 제보전화를 받고 있다.
1988년 5월 20일 개소한 장애인 시설 한사랑 마을
1989년 12월 13일 부산지부의 주최로 후원자와 아이들이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990년 어린이날 개최한 제3회 전국소년소녀가장 글짓기 및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뽀빠이' 이상용 씨가 사회를 보고 있다
1990년 어린이날 개최한 제3회 전국소년소녀가장 글짓기 및 그림 그리기 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이 열심히 작업에 몰두
1991년 1월 아프리카 아이들
1991년 1월 아프리카 아이들이 가축에게 물을 먹이고 있다.
1991년 4월 베비라 미아찾아주기 캠페인
1991년 소년소녀가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혼자 도는 바람개비' 홍보물을 극장 외벽에 설치했다.
1994년 8월 15일부터 30일까지 한국복지재단이라는 새로운 재단 명칭을 알리기 위해 서울 본부 건물에 현수막을 걸었다.
1996년 2월 베트남 아이들
1996년 2월 캄보디아 아이들
1996년 8월 21일부터 3일간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 아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의류 바자회를 개최했다.
1998년 5월 25일 서울 문래역 인근에서 무료급식 행사를 진행했다. 참여한 직원들과 봉사자, 지역 주민들
1999년 9월 11일 재단과 함께 진행하는 KBS '사랑의 리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손범수, 김연주 아나운서와 게스트로 출연한 최불암 후원회장
2001년 8월 31일에 한라산 등반 캠프에 참석한 아이들이 정상에 올라 소리쳤다.
2003년 10월 15일 창립 55주년 기념식에서 새로운 사명을 공개했다.
2005년 2월 16일 한사랑 학교를 졸업하는 아동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다.
2005년 6월 13일 '비전과 열정으로 재단의 주역이 되자'는 주제로 진행한 신입직원교육에서 직원들이 레크레이션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2005년 12월 1일에 정부로부터 위탁받아 실종아동전문기관 개소했다.
2006년 6월 9일 하안종합사회복지관에서 연기자 고두심 씨를 나눔 대사로 위촉했다. 당시 프로그램 중 하나로 고두심 대사와 아이들이 함께 율동을 하고 있다.
2006년 9월 13일 초등학교 아이들이 저금통에 모은 후원금을 전달했다.
2007년 3월 12일 제주종합사회복지관에 희망 장난감 도서관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 난타 공연을 하는 아이들
2007년 5월 20일 개최한 '오! 뻔뻔한 나눔' 행사. 참여한 임직원들과 시민, 아이들이 희망의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2007년 10월 17일 북한 평양육아원의 아이들이 낮잠 잘 준비를 하고 있다.
2007년 10월 평양 방문 당시 북한 여학생들이 재단 임직원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2007년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지나온 길
2008년 10월 15일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며 재단의 새 명칭인 어린이재단과 CI 미션을 선포했다
2009년 10월 31일 KBS와 함께 진행한 '사랑의 리퀘스트' 방송 중에 스튜디오에서 후원자들의 전화를 받고 있다
2009년 11월 20일 아동폭력예방교육을 들은 아이들이 워크숍 에서 배운 안전하게 씩씩하게 자유롭게를 외쳤다.
2010년 5월 5일 어린이날 열린 '초록우산 나눔행사'에 참여한 아이들이 우산에 그림을 그렸다.
2010년 서울시청 인근을 걷고 있는 산타원정대
2011년 3월 26일 김경란 홍보대사가 한사랑마을에 방문해서 자원봉사활동을 했는데 한 아동에게 밥을 먹여주고 있다
2011년 아동 성범죄 공소시효 폐지를 위해 '나영이의 부탁' 캠페인을 진행하여 시민들의 서명을 받았다.
2012년 12월 21일 'We Translate HOPES' 라는 주제로 재단의 봉사자들인 반디를 모셔 감사의 의미를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2012년 남수단 국가사무소 개소 후 이홍렬 홍보대사, 한국 직원들과 현지 직원이 함께 모여 기뻐하고 있다.
2013년 10월 10월 특별후원자, 30년이상 장기후원자, 고액후원자로 구성한 명예의 전당 제막식
2013년 11월 6일 제3회 나눔음악회에 참석한 마천종합사회복지관 초록우산 드림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지휘자가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2008년 8월 2일 스리랑카를 방문한 이홍렬 홍보대사가 현지 아이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2014년 2월 20일 학업과 음악 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선발한 아이리더 5기 발대식 현장
2014년 12월 16일 40년 만에 만나 감격하는 이정미씨와 어머니
2015년 3월 세월호 희생자 부모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15년 국회를 방문하여 놀이터 지원 방안 마련을 위한 서명을 전달하고, 아동 대표 지효은 양이 발언했다.
2016년 3월 11일 '애들아 밥먹자' 프로그램 진행자 샘킴과 참가자 부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