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사업 [10/17은 세계 빈곤퇴치의 날] 빈곤을 퇴치할 수 있을까

2020.10.146,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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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국제개발협력1본부 오민영

 

 

1987년 오늘,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한 프랑스 파리의 트로카데 광장에 모인 10만 명의 군중은 ‘절대빈곤 퇴치운동 기념비’를 세우며 빈곤 없는 세상을 꿈꿨다. 비석에는 “가난이 있는 곳에 인권침해가 있다. 인권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후 유엔은 이날은 ‘세계빈곤퇴치의 날’로 제정하고 이를 위한 국제사회의 공동 노력을 촉구해왔다.

 

 

빈곤퇴치 운동의 선구자 조제프 레신스키 신부

(출처: ATD Fourth World)

 

 

34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세계은행에 따르면, 1990년 36%에 달했던 하루 1.9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 비율이 2015년 10%로 감소하는 진전이 있었다. ‘새천년개발목표’ 아래 국제사회가 함께 노력한 결실이다. 그러나, 단순히 소득 수준이 나아진 것만으로 빈곤이 감소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빈곤의 양상은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교육, 보건, 생활환경 등 복합적이며, 최근에는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등 전에 없던 요인들이 새로운 빈곤층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극심한 가뭄으로 굶어죽은 케냐 투르카나의 가축

 

 

코로나19는 전염병이라는 전인류적 재난이 어떻게 불평등한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취약성을 심화시키는지 보여줬다. 가난한 자들, 가까스로 가난을 벗어났던 이들, 그리고 가난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보통’ 사람들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최근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이 발표한 보고서는 “코로나19가 등장한지 25주 만에 세계는 25년 전으로 되돌아갔”으며 “세계의 극빈층은 20년 연속 감소해 왔지만 (중략) 이제 4,00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다시 극빈층으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친구, 그리고 나 자신이기도 했다.

 

 

 

극빈층이 모여 사는 케냐의 한 슬럼가 옆 하천.

저 쓰레기 언덕에서 어린이들은 플라스틱병 등을 주워다 팔아 음식 살 돈을 마련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확실한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사실 뿐일 것이다. 누구도 전지구적인 재난과 질병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내게는 그런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도 없다. 2020년은 오래도록 우리의 기억과 역사에 남을 해이고, 이 경험은 빈곤이나 전염병이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균열을 냈다. 예상치 못한 어떤 일로 집을 잃고, 일자리를 잃고, 건강을 잃는다면,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러한 위기가 지속되고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 눈앞에 보이는 표지판은 하행선뿐일 것이다.

 

 

코로나19 발생 전, 어린이들과 마음껏 하이파이브를 하는 어린이재단 케냐 현지 직원

 

 

그런 의미에서 빈곤은 퇴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빈곤을 ‘퇴치’할 수 있다는 건 ‘나’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걸 전제로 타자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빈곤을, 빈곤한 사람들을 나와 구분하고 분리하고 배제한다면 빈곤퇴치는 빛깔 좋은 구호에 그칠 수 있다. 최초의 ‘빈곤 퇴치의 날’을 주도한 조셉 레신스키 신부는 빈곤이 인권의 문제이며, 이는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강조했다. 우리가 다시 거리낌 없이 악수를 할 수 있는 날은, 우리가 타자화 했던 이들에게 응답하고 반응하는 능력(response-ability, responsibility)을 가질 때에 올 지도 모른다. 우리가 분리해왔던 타자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 그리하여 세계가 다시 연결되는 것이 코로나19 이후의 진정한 뉴노말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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